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바니아 노동당 (문단 편집) ==== 중국과의 관계 ==== [[파일:호자저우언라이.jpg]]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에 반발한 호자는 60년대 중국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다. 1964년 1월 9일 티라나를 방문한 저우언라이는 "1964년 중국-알바니아 공동성명"에 서명한다. 1966년 호자는 공개 연설에서 "동지 여러분, 전 세계적으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 두 당과 두 국가는 분명히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싸우고 함께 이길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과의 관계는 1971년 7월 15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저우언라이를 만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기로 합의 하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호자는 이에 배신감을 느꼈고 알바니아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8월 6일 닉슨을 "광란한 반공주의자"라고 부르는 서한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냈다. >중국 공산당을 자매당이자 가장 가까운 동료로 생각하면서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견해를 숨긴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에게 제시한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베이징에서 닉슨을 수용하기로 한 귀하의 결정이 부정확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를 승인하거나 지지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닉슨의 발표된 중국 방문은 여러 나라의 인민, 혁명가, 공산주의자들이 이해하거나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1971년 중국 지도부는 "경제 발전에 대한 중국의 추가 기여에 대한 기대를 억제"하라는 경고를 보낸다. 그러자 호자는 자신의 일기 <중국의 반영>에 이렇게 기록한다.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이끄는 정책을 따르지 않고 있다. 그 정책은 견실한 기반이 아닌 우정, 동맹, 실용적인 관계를 통해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고 하는 강대국의 정책과 일치하고 있으며, 더욱 그럴 것이다. >알바니아는 더 이상 그들과 '충실하고 특별한 친구'가 아니다. 비록 경제적 협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초기의 열정'이 죽은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이에 1973년 중국과 알바니아의 무역은 1년 전의 1억 6,700만 달러에서 1억 3,600만 달러로 크게 감소한다. 중국이 호자와 40년대 후반 이후 시아가 나빠진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티토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고 아예 77년에는 중국으로 티토를 초청하자 호자는 더욱 분노하여 중국이 이제 소련, 유고슬라비아와 유사한 수정주의 국가이며, 알바니아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78년 중국과의 관계는 완전 단절된다. 그리고 78년 호자는 앞서 언급된 <제국주의와 혁명>을 발간하고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둘 다 반마르크스주의자이자 수정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우리 언론에서 마오쩌둥은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묘사되었지만, 우리는 마오쩌둥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고전으로, "마오쩌둥 사상"을 세 번째 이상으로 묘사한 중국 선전의 정의를 사용하거나 승인한 적이 없다. 우리 당은 중국에서 마오쩌둥 숭배의 팽창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닉슨이 중국에 초청되고 마오쩌둥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국 지도부가 미제국주의와의 화해와 통일 정책을 선포했을 때, 중국의 노선과 정책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에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에 따라 중국의 우월주의와 패권적 야망이 더욱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지도부는 인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진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의 혁명과 해방 투쟁을 보다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중국을 집권하고 있는 화궈펑(华国锋)과 덩샤오핑(邓小平) 수정주의 집단은 반동적 정책과 활동의 이론적 토대이자 사상적 기반을 "마오쩌둥 사상"으로 삼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